언젠가 나는 동물행동학자가 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콘라드 로렌츠가 갓 부화한 회색기러기 새끼들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자신을 어미로 각인시키는 흑백 사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였다. 그 사진에는 어떤 과장도 없었다. 늙은 오스트리아 사내가 풀밭에 앉아 있고, 그 뒤를 새끼 거위들이 줄지어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장면 안에는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따르게 되는가라는,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묻지 못했던 질문이 통째로 들어 있었다. 1973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그 질문을 던진 세 사람—로렌츠와 니코 틴베르헌, 그리고 칼 폰 프리슈—에게 돌아갔다. 동물의 행동을 연구한 학자들이 의학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의 스웨덴 한림원이 무엇을 기초과학으로 인정했는가를 보여주는 선언이었다.
폰 프리슈가 평생을 바쳐 해독한 것은 꿀벌의 춤이었다. 일벌 한 마리가 꽃밭을 발견하고 벌집으로 돌아와 8자를 그리며 추는 춤. 그 춤의 각도가 태양에 대한 꽃밭의 방향을 가리키고, 엉덩이를 흔드는 시간의 길이가 거리를 알려준다는 사실. 곤충 한 마리가 동료에게 추상적인 공간 정보를 상징으로 전달한다는 이 발견은, 인간만이 언어를 가진다는 오래된 믿음에 처음으로 균열을 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과학이란 결국 자연이 우리 눈앞에서 매일 벌이고 있으나 아무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은 일을 끝까지 응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늘 벌이 있었다.
이번 주, 나는 두 편의 논문을 나란히 펼쳐 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한 편은 네이처에, 다른 한 편은 사이언스에 실렸다. 두 편 모두 벌에 관한 것이었다.
- Fang, Y., Ma, B., Jin, X. et al. Queen cell architecture shapes honey bee queen development. Nature (2026). https://doi.org/10.1038/s41586-026-10534-3
- Akshaye A. Bhambore et al. ,Spontaneous problem-solving in bumble bees.Science392,1046-1049(2026).DOI:10.1126/science.ady1618
네이처에 실린 논문은 꿀벌이 여왕을 만드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여왕벌이 로열젤리라는 특별한 먹이로 만들어진다고 배웠다. 평범한 애벌레에게 로열젤리를 충분히 먹이면 여왕이 된다는, 거의 동화에 가까운 이야기. 그러나 이 연구는 그 이야기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일벌들은 여왕이 될 애벌레를 위해 땅콩 모양의 특별한 방—연구자들이 ‘로열 크립(royal crib)’이라 부른—을 짓는데, 이 방은 단순한 보호용 껍데기가 아니었다. 여왕의 방을 짓는 밀랍은 일벌의 방을 짓는 밀랍과 물리적으로도 화학적으로도 다르다. 밀도가 낮고, 더 유연하며, 녹는점이 높고, 고유한 지방산 조성과 화학 신호를 품고 있다. 연구진은 172개의 방에 여왕의 밀랍과 일벌의 밀랍을 각각 씌워 애벌레를 7일간 길렀고, 일벌의 밀랍으로 덮인 방에서 자란 여왕 애벌레들이 더 많이 죽고 더 작게 자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먹이가 아니라, 방이 여왕을 만든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먹이만이 아니라 방의 물리화학적 환경 전체가 여왕을 만든다.
그리고 연구진은 이 방을 짓는 일에만 특화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어린 일벌 집단—’여왕방 건축가(queen cell builder)’—를 발견했다. 이 어린 일벌들은 방을 지을 때 자신의 생리를 바꾸어 주변 온도를 높이고, 정교하게 설계된 밀랍으로 방을 짓는다. 한 연구자는 이것을 버킹엄 궁전에 비유했다. 여왕을 기르는 일에만 전념하는 전담 집단이 있고, 그들이 제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군락 전체가 번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패턴이 아시아 꿀벌과 유럽 꿀벌 양쪽에서 동일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 전략이 꿀벌의 진화 깊숙한 곳에 뿌리내리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은 호박벌에 관한 것이었다. 핀란드 오울루 대학의 연구진은 호박벌이 한 번도 훈련받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문제를 스스로 풀 수 있는지 시험했다. 그들은 호박벌에게 두 가지를 따로 가르쳤다. 파란 고리 모양의 ‘꽃’에 보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공이 움직일 수 있는 물체라는 것. 그런 다음 꽃을 천장으로 옮겨 호박벌의 손이 닿지 않게 만들었다. 호박벌들은 공을 꽃 아래로 굴려 와 그 위에 올라타 보상에 도달했다. 공을 발판으로 쓰는 이 행동 순서를 그들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연구진이 꽃을 시야에서 가려 공을 움직이는 동안 보이지 않게 한 통제 실험에서도 호박벌들은 과제를 성공시켰다. 이것은 눈앞의 보상에 이끌린 반사적 행동이 아니라, 머릿속에 목표를 품고 그것을 향해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이 실험에는 이름이 있다. 한 세기 전 볼프강 쾰러가 침팬지에게 던졌던 바로 그 문제. 천장에 매달린 바나나에 닿기 위해 상자를 쌓아 올리던 유인원의 통찰. 쾰러의 실험은 인간 외의 동물도 시행착오 없이 갑작스러운 통찰로 문제를 풀 수 있음을 보여준 행동과학사의 고전이었고, 오랫동안 그것은 큰 뇌를 가진 척추동물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제 좁쌀만 한 뇌를 가진 곤충이 같은 일을 해냈다. 연구진의 말처럼, 자발적 문제 해결이 무척추동물에서 입증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나는 이 두 편의 논문을 읽으며 묘한 감동과 더 묘한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감동의 이유는 분명하다. 이 두 연구는 폰 프리슈가 시작한 질문의 직계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벌이라는 작은 생명체가 우리가 인간의 전유물이라 믿었던 것들—설계, 건축, 사회적 분업, 추상적 목표, 계획, 통찰—을 어떻게 구현하는가. 이것은 응용을 전제하지 않은 질문이다. 여왕벌의 밀랍을 분석한다고 해서 당장 신약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호박벌이 공을 굴린다고 해서 새로운 로봇 알고리즘이 특허로 출원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후속 응용이 언젠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연구를 한 사람들이 처음 품었던 동기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벌은 어떻게 여왕을 만드는가. 벌은 정말로 생각하는가. 그 순수한 호기심이 네이처와 사이언스의 표지를 장식한다는 사실이야말로, 한 사회가 기초과학을 어떻게 대접하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지표다.
부끄러움의 이유는 더 길게 설명해야 한다.
나는 한국에서 생물학자로 출발해 이제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이 길에서 보냈다. 그동안 나는 한국 과학자가 이런 종류의 진짜 기초과학으로—다시 말해 당장의 쓸모를 묻지 않고 자연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호기심에서 출발한 연구로—네이처나 사이언스의 표지를 차지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오해는 말기 바란다. 한국 과학자들이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논문을 내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국의 좋은 연구실들은 매년 적지 않은 수의 논문을 최상위 저널에 싣는다. 그러나 그 논문들의 압도적 다수는 어떤 분자가 어떤 신호전달 경로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질병의 메커니즘, 표적 단백질, 치료의 단서. 유용하고 정교하고 경쟁이 치열한 연구들. 그러나 그중 어느 것도 “벌은 어떻게 여왕을 만드는가” 같은 질문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사소하지 않다. 메커니즘 연구는 본질적으로 답이 어디 있는지 이미 아는 연구다. 어떤 현상이 있고, 그 배후의 분자적 기전을 캐내면 된다. 질문은 주어져 있고, 경쟁은 누가 더 빨리 더 정밀하게 그 기전을 밝히는가에 달려 있다. 반면 폰 프리슈가 벌의 춤을 들여다본 것이나, 핀란드 연구진이 호박벌에게 공을 던져준 것은 질문 자체를 발명하는 일이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 답도 없던 영역에 처음으로 빛을 비추는 일. 전자가 정교한 기술과 자원의 경쟁이라면, 후자는 상상력과 철학의 문제다. 그리고 한 나라의 기초과학의 깊이는, 정확히 후자에서 드러난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생겼을 때 나는 기대했다. 2011년, 한국이 마침내 노벨 과학상의 산실을 만들겠다며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세운 기관. 연구단장에게 권한과 자원을 집중시켜 장기적이고 모험적인 연구를 가능케 하겠다는 그 취지에 나는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기초과학은 단기 성과로 평가할 수 없고, 따라서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지원이야말로 그 핵심이라는 인식에 도달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곳에서 나오는 연구들을 보며 다시 그 부끄러움을 느낀다. IBS의 연구단들이 내놓는 성과의 상당수는—암흑물질 탐색이나 액시온 연구 같은 일부 물리학 분야를 제외하면—여전히 유행을 따라간다. 우울증의 새로운 기전, 척수손상 회복의 분자적 제동장치, 조류인플루엔자가 포유류에 치명적인 이유. 모두 훌륭하고 중요한 연구다. 그러나 이것들은 본질적으로 메커니즘 연구이고, 세계 어디서나 수많은 연구실이 동시에 달려들고 있는 경쟁의 트랙 위에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그게 뭐가 문제냐고, 그것도 훌륭한 과학이 아니냐고. 맞다. 훌륭하다. 그러나 노벨상의 산실을 표방하며 세운 기관이 다른 정부출연연구소와 구별되는 뚜렷한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과학계 안팎의 비판이 십수 년째 반복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그 이유가 연구의 질이 아니라 연구의 종류에 있다고 본다. IBS조차도 질문을 발명하기보다 답을 추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더 불편한 사실 하나를 마주해야 한다. 이번에 네이처에 실린 여왕벌 논문의 주저자와 교신저자는 중국 과학자들이다. 중국농업과학원(CAAS)의 연구진이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자들과 함께, 행동과 생리학에서 재료과학, 화학, 유전체학에 이르는 학제를 한데 묶어 이 연구를 해냈다. 한때 ‘세계의 공장’으로만 불리던 그 나라가, 이제 벌이 여왕을 만드는 방식이라는 가장 근본적이고 쓸모를 묻지 않는 질문을 네이처의 표지에 올려놓는 데까지 왔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 앞에서 한국 기초과학의 위치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더 많은 예산과 더 좋은 장비와 더 똑똑한 사람들을 가지고도 끝내 도달하지 못한 어떤 경지에, 우리의 이웃은 이미 발을 들여놓았다.
나는 이것이 단순히 돈이나 인재의 문제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것은 질문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고, 더 깊게는 한 사회가 호기심이라는 비효율을 견딜 수 있는가의 문제다. 여왕벌의 밀랍이 일벌의 밀랍과 어떻게 다른지를 묻는 연구는, 그 질문이 무르익어 네이처에 실리기까지 수년에 걸친 무목적적 관찰과 측정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그 연구자는 어떤 성과지표로도 자신을 증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호박벌에게 공을 던져주고 그것이 발판을 쓸 줄 아는지 지켜본 연구자 역시, 수많은 실패한 시도와 침묵의 시간을 통과했을 것이다. 우리의 평가 체계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매년 임팩트팩터로 환산되는 논문 편수를 요구하고, 3년이면 끝나는 과제 주기에 맞추어 결과를 내놓으라 다그치는 체계 안에서, “벌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같은 질문은 애초에 시작될 수 없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연구자는 다음 평가에서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폰 프리슈는 1886년에 태어나 평생을 벌과 물고기의 감각을 연구하는 데 바쳤다. 그가 벌의 춤을 해독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다. 만약 그가 오늘의 한국에서 연구했다면, 그는 첫 5년 안에 연구비 지원이 끊겼을 것이고, 그의 8자 춤 노트는 미완의 원고로 서랍 속에 남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의 노벨상을 부러워하면서도 그를 길러낼 토양은 끝내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렇다고 절망만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두 편의 벌 논문이 한국 과학계에 던지는 질문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답을 추격할 것인가, 아니면 이제 질문을 발명할 것인가. 우리의 연구실과 연구기관과 평가 체계는, 당장의 쓸모를 묻지 않는 호기심을 위한 자리를 단 한 평이라도 마련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어린 일벌들이 여왕의 방을 지을 시간을, 그 비효율적이고 무목적적인 건축의 시간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여전히 가끔, 풀밭에 쭈그리고 앉아 새끼 거위들에게 둘러싸인 로렌츠의 사진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사진이 내게 가르쳐준 것을 다시 새긴다. 위대한 과학은 거창한 장비나 막대한 예산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구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은 자연의 한 장면 앞에, 쓸모를 묻지 않고 오래 머무를 줄 아는 한 사람의 응시에서 시작된다. 여왕벌의 방을 짓는 어린 일벌처럼, 공을 굴려 발판을 만드는 호박벌처럼. 그 응시를 허락하는 사회가 결국 기초과학을 갖는다. 나는 한국이 언젠가 그런 사회가 되기를, 그래서 한국의 어느 연구자가 벌이 던지는 질문 앞에 오래 머무른 끝에 네이처의 표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날을, 부끄러움이 아니라 오롯한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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