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초파리 유전학자가 읽은 ‘과학의 날 60주년’ 포럼
더 플라자 호텔의 원탁에서 반복된 34년 전 구호에 부쳐
1.
초파리는 썩어가는 바나나 냄새를 맡고 온다. 실험실 구석, 우유병 안에서 자란 노랑초파리(Drosophila melanogaster)는 열흘이면 한 세대를 갈아치운다. 나는 그 열흘의 리듬에 맞춰 20년 넘게 살아왔다. 파리가 알을 낳고, 유충이 배지를 기어다니고, 번데기에서 성체가 우화(羽化)하는 그 지루하고 반복적인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런데 며칠 전 대덕넷 기사 하나를 읽으며, 나는 문득 초파리 배양병을 들여다보는 일과 한국 과학기술정책 포럼을 들여다보는 일이 놀랍도록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둘 다 열흘, 아니 20년을 주기로 똑같은 것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난다. 다만 초파리는 매번 조금씩 진화하지만, 포럼은 그렇지 않다.
2026년 8월 13일, 서울 중구 더 플라자 호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PACST)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제1차 PACST 과학기술 포럼’을 열었다. 2027년 ‘과학의 날’ 60주년을 앞두고 지난 60년을 진단하고 앞으로의 60년을 설계하겠다는 자리였다. 자문회의는 이 포럼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이어지는 네 차례의 시리즈—1차는 ‘국가 R&D의 이유와 방향’이라는 총론, 이후 회차는 각각 지원방식과 성과, 지속 가능한 연구환경—를 거쳐 그 내용을 종합해 대통령에게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기사 제목은 이랬다. “과학의 날 60주년···과기계 ‘이제는 모방 넘어 국격 생각해야’.” 나는 이 제목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냉소가 아니라, 거의 애처로움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2.
먼저 이 포럼이 무엇을 말했는지 충실히 옮겨보자. 발제를 맡은 홍성주 STEPI 선임연구위원(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위원)은 해방 이후 과학기술 발전사를 경제성장과 효율성 중심으로 분석한 뒤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은 제대로 하고 있는가라는 효율성과 효과성 관점에만 매몰돼 있었다. 앞으로 미래를 위해서는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무엇을 위해 투자하는가’라는 목적론적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향후 국가 R&D가 목적·시간·책임과 성과라는 세 가지 논리 구조를 갖춰야 한다며, R&D의 목적을 경제성장, 전략적 자율성, 사회문제 해결, 탐구 자체의 가치 네 가지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주목할 문장이 하나 있다. 홍 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20년간 정권이 바뀌어도 비효율이냐 자율성이냐 사이에서 비슷한 진단과 처방을 해왔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발제자 본인이 20년의 반복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는 그 반복의 고리를 ‘목적론’이라는 또 하나의 새 단어로 끊겠다고 했다. 20년간 실패한 처방전 위에 형용사 하나를 더 얹는 방식으로.
이경수 부의장은 포럼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누군가는 던져야 하지만 쉽게 던지기 어려운 질문을 우리가 시작해보려 한다.” 그는 “현재 R&D 예산 45조원은 정부가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을 5%로 목표로 한다면 60조원 수준까지 늘어날 수 있다”며, “연구자로서 우리가 지금까지 열심히 해온 일들이 국민의 눈높이에서 볼 때 단순한 관성에 따른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고 했다.
토론은 화려했다. 김근배 KAIST 교수는 “한국 과학기술계가 자신의 역사를 너무 모른다”며 동료의 성취를 인정하고 기록하는 과학문화를 강조했다. 권기석 한밭대 교수는 “과거의 제도가 미래의 활동을 제약하는 경로에 갇혀 있다”며 실적주의 강화와 전략적 관리체계를 주문했다. 김소영 KAIST 교수는 인구 감소 시대의 자원 배분과 사회적 합의를 이야기했다. 윤의준 한국공학한림원 회장(과기자문회의 자문위원)은 “국격에 걸맞은 과학기술”을 강조하며 단년도 예산과 짧은 평가 사이클의 한계를 지적했다. 오현환 KISTEP 정책기획본부장은 2024년 R&D 예산 삭감 사태를 언급하며 “정부 지원이 끊기더라도 연구를 지속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연구 기관들이 자생력을 갖추었는지”를 물었다. 사회를 본 이석봉 대덕넷 대표는 과학자들이 “내 분야의 문제만 이야기하며 울분을 토하는 것이 아닌 국가적, 사회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마무리했다.
한 명 한 명 훌륭한 분들이다. 이 글은 그들 개인을 겨냥하지 않는다. 내가 겨냥하는 것은 이 원탁 자체다.
3.
먼저 얼굴들을 보자. KAIST 교수 둘, 한밭대 교수 하나, 공학한림원 회장, KISTEP 본부장, STEPI 선임연구위원, 과학언론사 대표, 그리고 핵융합 출신의 자문회의 부의장. 대통령 직속 헌법기구가 주최하고, 국책연구원이 판을 깔고, 총장급·회장급·본부장급이 원탁에 앉는다. 이것이 한국 과학정책 담론의 표준 배역이다. 나는 이 배역표를 20년 전에도 보았고 10년 전에도 보았다. 배우의 이름만 바뀔 뿐 배역은 그대로다.
이 원탁에 없는 사람들의 목록을 적어보자. 실험대에서 밤을 새우는 대학원생. 3년짜리 계약을 전전하는 포닥. 언제 잘릴지 모르는 출연연 비정규직 연구원. 20년간 한 실험 장비를 지켜온 테크니션.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대의 연구자. 논문보다 기업지원 실적으로 평가받는다며 홍성주 위원이 언급한 바로 그 “지역에서 R&D를 수행하는 분들.” 정작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들 중 단 한 명도 그 원탁에 앉히지 않았다. 이것이 한국 과학정책 포럼의 오래된 문법이다. 현장을 의제로 삼되, 현장을 초대하지는 않는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구조를 비판해왔다. 한국은 과학기술정책의 수립 과정에서 과학기술자를 배제하는 유일한 국가라고. 박정희 시대 이후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은 경제학·행정학·경영학을 전공한 문과 출신 관료와 정치인의 합작품이었고, 그 사이로 연구보다 정치에 관심 많은 정치과학자들이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었다. 녹색성장, 창조경제, 4차 산업혁명은 모두 그들이 정치인에게 헌사한 쇼비즈니스였다. 이번엔 ‘목적론’과 ‘국격’이 그 자리를 대신할 차례다.
4.
이제 이 포럼의 핵심 구호를 해부하자. “모방과 추격을 넘어.” 나는 이 문장을 어디서 들었던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 우리는 모두 이 문장을 수십 번 들었다.
한국 과학기술정책에서 “추격형에서 선도형으로”, “모방에서 창조로”라는 구호는 새것이 아니다. 그것은 최소 1990년대 초부터 정확히 같은 문장으로 반복돼 왔다.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2001년까지 선진 7개국 수준 진입”을 선언했고, 1992년 이른바 G7 프로젝트(선도기술개발사업)가 착수됐다. 추격을 넘어 세계 일류로 가겠다는 최초의 대형 국책사업이었다. 1997년 12월 과학기술혁신 5개년계획은 “21세기 초에 선진국 수준으로” 과학기술력을 끌어올리겠다고 했고, IMF 직후인 1998년에는 “모방·개량에 바탕을 둔 연구개발에서 탈피하여 독창적인 원천기술 개발”을 표방하며 1999년 21세기 프론티어사업을 시작했다.
그 다음은 더 노골적이다. 2012년 박근혜 대선후보는 “경제체질을 다른 나라를 따라가는 ‘추격형’에서 다른 나라에 앞서가는 ‘선도형’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2013년 미래창조과학부의 ‘창조경제 실현계획’은 “모방과 추격에서 창의와 선도로 전환”을 공식 문구로 못박았다. 2016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한 제1차 과학기술전략회의의 ‘정부 R&D 혁신방안’은 언론에 “정부 R&D전략 50년만에 전면 손질… 추격형서 선도형으로 개편”으로 제목화됐다. 2020년 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은 “추격형 경제에서 선도형 경제로”를 비전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2025년, 바로 이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투자방향 문서조차 “추격형 R&D를 탈피하고… 선도형 R&D 투자시스템으로 전환”을 명시했다.
그러니 2026년 더 플라자 호텔에서 “모방을 넘어 국격”을 이야기하는 것은, 34년째 같은 노래의 후렴구를 부르는 것이다. 이 반복을 가장 통렬하게 증언한 사람은 놀랍게도 관료 자신이다. 과학기술부 차관을 지낸 한 원로 인사는 2013년 한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70년대초 과학기술 정책이 체계적으로 수립된 이후 현재까지도 줄기차게 부르짖었던 구호가 ‘모방에서 창조로’였고 미래에도 변함은 없을 것으로 본다.” 원로 관료가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40년째 부르는 구호이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예언자였다. 2026년의 포럼이 그의 예언을 정확히 실현했으니까.
‘이공계 기피’도, ‘기초연구 확대’도 마찬가지다. 이공계 기피는 2002년 7월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범부처 촉진방안을 마련하며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고 그 뒤 20년간 매년 재활용됐다. 기초연구 확대는 1997년(세계 10위권 진입), 2007년(기초연구비 2배), 2016년(1조5000억원 확대)에 판박이처럼 반복 설정됐다. 부처 칸막이 제거, 규제 완화, 인재 양성—이 모든 진단과 처방은 새 정권마다 새 포장지에 담겨 다시 배송된다. 포럼은 이 재활용의 의식(儀式)이다.

5.
그렇다면 이런 포럼은 무엇을 생산하는가. 나는 냉정하게 답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보고서 한 편과 사진 몇 장, 그리고 참석자들의 이력서에 추가될 한 줄을 생산한다. 자문회의는 이번 포럼을 포함해 총 4번의 포럼을 거쳐 대통령에게 보고하겠다고 했다. 네 번의 원탁, 네 번의 호텔 대관료, 네 번의 케이터링, 그리고 대통령 책상에 놓일 한 편의 보고서. 그 보고서가 지난 34년간의 보고서들과 무엇이 다를지, 나는 예측할 수 있다. 형용사만 다를 것이다.
이것이 이 장르의 무쓸모다. 여기엔 대책이 없다. 대책이란 예산 배분의 실제 규칙을 바꾸는 것이고, 평가 제도를 뜯어고치는 것이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고, PBS(연구과제중심제도)로 연구자를 연구비 사냥꾼으로 만드는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포럼은 그런 것을 논의하지 않는다. 포럼은 “질문을 던지자”고 말한다. 이경수 부의장의 표현대로 “누군가는 던져야 하지만 쉽게 던지기 어려운 질문”을. 그러나 그 질문은 34년 전에 이미 던져졌다. 34년째 답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6.
가장 잔인한 대목은 따로 있다. 이 축하와 성찰의 포럼이, 현장 연구자를 실제로 짓밟은 정책과 나란히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불과 2년 전, 윤석열 정부는 2024년 국가 R&D 예산을 본예산 31조1000억원에서 4조6000억원(14.7%)이나 삭감해 26조5000억원으로 확정했다(2023년 12월 21일 국회 본회의 통과). 대통령은 기초연구를 “카르텔”이라 불렀다. 그 결과는 원탁이 아니라 실험대에서 나타났다. 대학원생의 학생인건비가 깎였다. 한 대학 연구자는 6년짜리 연구가 2년을 남긴 시점에서 “예산이 부족하니 자발적으로 사업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과제 연구비가 80% 삭감돼 계약직 연구원인 남편이 실직하자, 박사과정 대학원생인 아내가 자녀를 포함한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학업을 미루고 아르바이트를 구했다는 사연이, 지도교수를 통해 전해졌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와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가 피해 사례를 직접 조사해야 했다.
흥미롭게도 이번 포럼에서 오현환 KISTEP 본부장은 바로 그 2024년 예산 삭감을 언급했다. 그런데 그가 끌어낸 결론은 “우리 연구 기관들이 자생력을 갖추었는지”였다. 나는 이 논리에 소름이 돋았다. 정부가 예산을 일방적으로 잘라놓고, 그 폭력의 책임을 “자생력을 못 갖춘” 연구 현장에 되돌리는 화법. 트럼프 행정부가 하버드의 자금을 끊은 것을 두고 “하버드처럼 버틸 힘을 길러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예산을 자른 칼은 위에서 내려왔는데, 베인 상처를 탓하는 것은 아래를 향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원탁이 누구의 편인지 보여주는 증거다.
축하 포럼과 예산 삭감은 모순이 아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위에서는 “국격”과 “목적론”을 논하고, 아래에서는 대학원생이 인건비를 잃는다. 60주년을 기념하는 화려한 원탁과, 그 원탁에 초대받지 못한 이들의 잘려나간 통장. 이 둘이 같은 나라에서 같은 해에 일어난다.
7.
나는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가 매일 들여다보는 초파리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현대 유전학은 1910년대 컬럼비아대학의 비좁은 방 한 칸, 이른바 ‘플라이룸(fly room)’에서 태어났다. 토머스 헌트 모건과 그의 제자들—앨프리드 스터티번트, 캘빈 브리지스, 허먼 멀러—이 우유병과 썩은 바나나를 놓고 초파리를 길렀다. 스터티번트는 학부생 시절 최초의 유전자 지도를 그렸고, 브리지스는 침샘 염색체 지도를 그렸다. 과학사학자 로버트 쾰러는 그의 저서 『초파리의 군주들(Lords of the Fly)』에서, 이 방의 성공이 초파리의 생물학적 이점 때문만이 아니라 연구자들이 만들어낸 독특한 문화 때문이었다고 썼다. 그 문화의 이름이 ‘도덕 경제(moral economy)’다.
무슨 뜻인가. 모건의 방에서는 새로운 돌연변이 계통을 발견하면 요청하는 누구에게나 공짜로 보내주었다. 밀턴 데메렉은 초파리 계통 보관소의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계통을 청하면 계통으로 답하는 증여의 경제, 그 실체는 신뢰였다. 이 규범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다. 오늘날 전 세계 초파리 유전학자는 플라이베이스(FlyBase)라는 데이터베이스와 블루밍턴 초파리 보관소를 통해 서로에게 초파리를 부친다. 이 생태계는 어느 부처가 만든 것도, 어느 출판사가 만든 것도 아니다. 연구자들이 공동체의 규범을 따라, 좋은 연구가 가야 할 곳은 공유지라고 결정하면서 쌓아 올린 문명의 결정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상향식(bottom-up) 과학이다. 모건의 플라이룸은 방 한 칸이었다. 현대 유전학을 공동의 사업으로 만든 기술은 거창한 로드맵이 아니라 우편 제도와 습관이었다. 위대한 과학은 대형 프로젝트 회의실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다윈은 따개비를 8년간 들여다본 사람이었고, 아인슈타인은 빛을 타고 달리면 무엇이 보일까를 상상한 사람이었다. 콘라트 로렌츠는 갓 부화한 회색기러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자신을 어미로 각인시켰고, 카를 폰 프리슈는 평생을 바쳐 꿀벌의 춤을 해독했다. 1973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이 세 동물행동학자—카를 폰 프리슈, 콘라트 로렌츠, 니콜라스 틴베르헌—에게 “개체 및 사회적 행동 양식의 조직화와 유발에 관한 발견(for their discoveries concerning organization and elicitation of individual and social behaviour patterns)”을 이유로 공동 수여됐다. 그들 중 누구도 “국격”이나 “전략적 자율성”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관료들은 과학을 자판기처럼 생각한다. 예산이라는 동전을 넣으면 노벨상이나 혁신 기술이라는 캔음료가 툭 떨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실제 과학의 현장은 훨씬 더 복잡하고 인간적이며, 때로는 비효율적인 도제 시스템 속에서 작동한다. 과학은 논문으로 기록되지만, 사람으로 전승된다. 그것을 우리는 학풍이라, 계보라 부른다. ‘목적론’을 한 번 더 선언한다고 이 계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8.
그렇다면 진짜 대안은 무엇인가. 나는 이 원탁을 부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첫째, 원탁에 앉는 사람을 바꿔야 한다. 총장·회장·본부장의 자리 절반을 대학원생, 포닥, 비정규직 연구원, 테크니션, 지방대 연구자에게 내어주어야 한다. 현장을 의제로만 소비하지 말고, 현장을 발언대에 세워야 한다. 홍성주 위원이 언급한 “지역에서 논문보다 기업지원 실적으로 평가받는 분들”을 그 자리에 앉히면, 목적론 강연보다 훨씬 구체적인 대책이 나올 것이다.
둘째, 과학자의 독립적 목소리를 제도화해야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말해왔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는 정부의 예산으로 움직이는 사실상의 관변단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국의 과학자 단체들처럼 정부와 동등한 입장에서 국회와 직접 예산을 협상하는 독립 기구다. 2024년 예산 삭감 때 실제로 싸운 것은 과총이 아니라 ESC와 대학원생노조였다. 그것이 답을 알려준다. 견제할 힘이 없는 축하는 굴종이다.
셋째, 포럼이 아니라 규칙을 바꿔야 한다. PBS를 개혁하고, 단년도 예산과 짧은 평가 사이클을 연구의 호흡에 맞추고—이건 윤의준 회장도 지적한 바다—비정규직의 신분을 안정시키는 재원을 확보하는 것. 이것들은 원탁의 담론이 아니라 예산서의 숫자로만 증명된다.
넷째,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과학을 경제성장의 도구로만 보는 60년 묵은 프레임을 버려야 한다. 박정희 시대에 시작된 “과학기술=경제발전 도구”라는 등식은, 이번 포럼의 “무엇을 위해 투자하는가”라는 질문 속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홍성주 위원이 R&D의 목적 중 하나로 “탐구 자체의 가치”를 넣은 것은 반갑다. 그러나 그것을 네 개 중 하나로, 경제성장과 나란히 놓는 순간 그것은 다시 배분의 대상이 된다. 과학은 국가 발전의 도구이기 이전에 하나의 문화이자 삶의 양식이다. 사회학자 해리 콜린스의 말처럼, 사회 안에서 과학의 근본적 역할은 개인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집단적 가치의 등대로서 구실하는 것이다. 응시를 허락하는 사회가 결국 기초과학을 갖는다.

9.
나는 다시 초파리 배양병 앞에 앉는다. 열흘 뒤면 새 세대가 우화할 것이다. 그 파리들은 부모 세대와 조금 다를 것이다. 돌연변이가 쌓이고, 선택이 작동하고, 유전자가 재조합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화다.
그런데 한국 과학정책의 포럼은 진화하지 않는다. 34년 전 노태우가 던진 “선진국 진입”이라는 알에서 부화해, 박근혜의 “추격형에서 선도형으로”를 거쳐, 2026년 “모방을 넘어 국격”으로 우화했지만, 유전자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돌연변이도, 선택도 없다. 오직 같은 배지 위에서 같은 파리가 계속 태어날 뿐이다. 내가 이 포럼을 초파리에 빗대는 것은 초파리에게 미안한 일이다. 초파리는 적어도 진화하니까.
과학의 날 60주년을 진심으로 기념하고 싶다면, 호텔 원탁을 하나 더 예약할 것이 아니라, 지난 34년간 던져놓고 답하지 않은 질문의 목록을 만들어 벽에 붙여야 한다. 그리고 그 앞에 대학원생과 포닥과 테크니션을 앉혀야 한다. 그들에게 마이크를 주고, 총장과 회장은 뒷줄에 앉아 듣기만 해야 한다. 그것이 60년 만에 처음으로 진화하는 포럼이 되는 길이다. 나머지는 그저, 그 밥에 그 나물이다.
— 초파리 유전학자, 보통과학자 김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