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L;DR
- 서평 한 편의 질문. 교수신문이 10월 9일 실은 정우현 교수의 서평은 앤 파우스토-스털링의 『섹싱 더 바디』를 소개하며, 몸의 차이 가운데 무엇을 정상으로 보고 무엇을 고칠 대상으로 볼지는 생물학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저자의 주장과, 그렇다고 남녀라는 생식적 범주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서평자의 반론을 나란히 놓았다.
- 초파리 방의 오래된 답. 100여 년 전 컬럼비아대 파리방의 캘빈 브리지스는 염색체 수가 어긋난 초파리에서 암수의 중간 형태를 찾아내고, 성이 하나의 유전자가 아니라 염색체들 사이의 ‘균형’에서 결정된다고 보았다. 이후 초파리유전학은 그 신호가 몇 단계의 스위치와 RNA 편집을 거쳐 몸 곳곳의 세포에서 따로따로 읽힌다는 것을 밝혀 왔다.
- 초파리유전학자의 결론. 배우자는 두 종류지만, 거기에 이르는 발생의 길은 여러 갈래다. 둘은 모순이 아니다. 과학이 할 일은 범주를 지키거나 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주가 몸 안에서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끝까지 보여 주는 것이다.
초파리 방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기술은 암수를 가르는 일이다. 마취한 파리를 하얀 판 위에 쏟고, 붓으로 한 마리씩 굴려 가며 배 끝의 색과 모양, 앞다리의 작은 털 뭉치를 본다. 처녀 암컷을 모으려면 이 일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해야 한다. 익숙해지면 손이 먼저 안다. 〔필자 경험: 처음 암수 구분을 배우던 때나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구체적 장면을 넣을 자리〕
그런데 그 판 위에서도 가끔 손이 멈춘다. 몸의 한쪽은 수컷, 다른 쪽은 암컷처럼 보이는 파리가 나오기도 하고, 유전자를 조작한 계통에서는 어느 쪽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파리가 나오기도 한다. 초파리유전학자에게 ‘암컷과 수컷’은 매일 쓰는 분류이면서, 동시에 한 세기 넘게 파고들어 온 연구 주제다.
10월 9일 교수신문에 실린 서평 한 편을 읽고 이 판 위의 장면이 떠올랐다. 덕성여대 정우현 교수가 앤 파우스토-스털링의 『섹싱 더 바디』를 다룬 글이다. 성을 둘러싼 논쟁은 요즘 어느 사회에서나 뜨겁다. 나는 그 논쟁의 어느 편에 서려는 것이 아니라, 초파리 방이 이 질문에 대해 쌓아 온 것을 꺼내 보려 한다.
서평 한 편이 던진 질문

서평이 소개하는 출발점은 배우자의 크기다. 생물학에서 암컷은 큰 배우자, 곧 난자를 만드는 쪽이고 수컷은 작은 배우자, 곧 정자를 만드는 쪽이다. 난자는 발생에 필요한 양분과 세포질을 싣고, 정자는 유전정보를 옮기는 데 특화돼 있다. 서평은 효모처럼 교배형 사이에 크기 차이가 없는 생물도 있다는 점을 들어, 자연의 생식 방식이 한 가지만은 아니라는 점도 짚는다.
파우스토-스털링의 주장은 그다음에 나온다. 사람의 몸에서 염색체, 생식샘, 호르몬, 생식기는 언제나 한 방향으로 나란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간성(intersex)의 몸이 그것을 보여 준다. 서평에 따르면 저자가 1993년에 내놓은 ‘다섯 개의 성’은 성이 정말 다섯 가지라는 주장이 아니라, 모든 몸을 두 칸에 나눠 담을 수 있다는 믿음을 흔들기 위한 사고실험이었다. 저자는 어떤 차이를 정상의 범위로 볼지, 치료가 필요한 이상으로 볼지는 순수한 생물학이 아니라 의학과 사회의 판단이 함께 정한다고 본다. 급하지 않은 아이에게 되돌릴 수 없는 수술을 하던 관행이 윤리적 비판을 받게 된 것도 그 맥락이다.
서평자는 여기서 선을 긋는다. 성 발달이 복잡하다는 사실과 남녀라는 생식적 범주가 있다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으며, 간성의 몸이 제3의 배우자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의 규범이 의학적 분류에 스며든다고 해서 성 분화의 물질적 기반까지 사회가 만든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덧붙인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남녀가 없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라 그 경계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그었는지 돌아보게 하는 책으로 소개한다.
나는 이 서평이 좋은 이유가 결론보다 구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범주는 실재한다’와 ‘범주에 이르는 길은 복잡하다’를 한 화면에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문장이 어떻게 함께 참일 수 있는지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 바로 초파리 방이다. 이것은 나의 해석이다.
브리지스의 삼배체 파리

모건의 파리방에서 염색체를 가장 끈질기게 들여다본 사람은 캘빈 브리지스였다. 그는 1910년대에 X 염색체가 제대로 갈라지지 않는 ‘비분리’ 현상을 추적해, 유전자가 염색체 위에 있다는 모건 학파의 가설에 결정적인 증거를 보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흥미로운 파리가 나왔다. X 염색체가 하나뿐이고 Y가 없는 파리가 수컷이었던 것이다. 다만 생식력은 없었다.
사람에서는 반대다. X 하나만 가진 사람은 여성의 몸으로 자라고, X 두 개에 Y를 가진 사람은 남성의 몸으로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유류에서는 Y 염색체 위의 유전자 하나가 생식샘을 정소 쪽으로 이끄는 스위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같은 X와 Y라는 이름을 쓰지만, 초파리에서 Y는 수컷을 ‘만드는’ 염색체가 아니라 정자 형성에 필요한 염색체에 가깝다. 염색체가 성을 정한다는 말은 생물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참이다.
브리지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920년대 초 그는 염색체 세트가 세 벌인 삼배체 초파리를 얻었고, 그 자손 가운데 X 염색체와 상염색체의 비율이 어중간한 파리들이 암컷도 수컷도 아닌 중간 형태, 곧 간성으로 자란다는 것을 보고했다. 그는 이것을 근거로 성이 하나의 유전자가 아니라 X 염색체 쪽 요인과 상염색체 쪽 요인 사이의 ‘균형’으로 정해진다고 보았다. 이른바 유전자 균형설이다.
이 이야기에서 내가 오래 붙드는 것은 결론보다 태도다. 브리지스는 판 위에서 손이 멈추는 파리를 버리지 않았다. 분류에서 벗어난 개체를 예외로 치우지 않고, 바로 그 개체를 통해 규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물었다. 파리방의 유전학은 늘 그렇게 ‘이상한 파리’에서 정상의 원리를 읽어 냈다.
덧붙여 둘 것이 있다. 이후의 연구는 초파리가 실제로 세는 것이 X와 상염색체의 ‘비율’이라기보다 X 염색체의 ‘양’에 가깝다는 쪽으로 해석을 고쳐 왔다. 브리지스의 그림은 한 세기 동안 다듬어졌다. 과학의 범주는 그렇게 계속 고쳐 쓰인다.
스위치와 스플라이싱

브리지스 이후 수십 년 동안 초파리유전학은 그 ‘균형’이 몸 안에서 어떻게 읽히는지를 하나씩 풀었다. 지금의 교과서적 그림은 대략 이렇다. 발생 초기에 X 염색체의 양이 신호가 되어, Sex-lethal이라는 유전자를 켤지 말지를 정한다. 이 유전자가 켜지면 그 아래로 transformer라는 유전자의 RNA가 암컷 방식으로 잘리고 이어 붙여진다. 그 결과 doublesex와 fruitless라는 유전자도 암컷형 또는 수컷형의 서로 다른 단백질을 만든다.
여기서 핵심은 ‘스플라이싱’이다. 같은 유전자에서 나온 RNA가 어떻게 편집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성은 유전자의 있고 없음이 아니라, 같은 유전자를 어떤 판본으로 읽느냐의 문제다. 염색체의 양이라는 연속적인 신호가 몇 단계의 스위치를 거치며 두 갈래의 출력으로 정리되는 셈이다.
또 하나의 핵심은 이 판단을 세포마다 따로 내린다는 점이다. 초파리에서는 호르몬이 온몸에 성을 지시하기보다 각 세포가 자기 염색체를 보고 스스로 성을 정하는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발생 초기에 한 세포에서 X 염색체 하나를 잃으면, 그 세포의 자손들만 수컷이 되어 몸의 절반은 수컷, 절반은 암컷인 자웅 모자이크가 나온다. 판 위에서 손을 멈추게 하던 바로 그 파리다.
fruitless는 특히 행동과 이어진다. 이 유전자의 수컷형 단백질은 구애 행동에 관여하는 신경 회로에 놓여 있고, 그 회로의 성을 바꾸면 행동의 방향도 바뀐다는 연구들이 이어졌다. 몸의 성과 뇌의 성, 그리고 행동이 같은 스위치에 매여 있으면서도, 세포와 회로 단위로 서로 어긋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그림이 말해 주는 것은 단순하다. 초파리의 몸은 거의 언제나 두 가지 출력 가운데 하나로 수렴한다. 그러나 그 출력은 미리 박힌 표지가 아니라, 신호를 세고 스위치를 넘기고 RNA를 편집하는 발생의 과정이 만들어 낸 결과다. 그리고 과정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어긋남도 있다.
범주와 연속 사이에서

다시 서평으로 돌아가자. 초파리 방의 경험은 서평자와 저자 양쪽에 각각 근거를 준다. 서평자의 말처럼, 초파리는 결국 큰 배우자나 작은 배우자 가운데 하나를 만들거나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 제3의 배우자는 없다. 동시에 저자의 말처럼, 그 두 출력에 이르는 길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져 있고, 각 단계는 세포와 조직마다 다르게 어긋날 수 있다. 두 문장은 같은 파리 안에서 함께 참이다.
내가 보기에 논쟁이 엉키는 지점은 ‘생물학적 범주’와 ‘사회적 판단’이 같은 단어를 쓰기 때문이다. 배우자의 종류를 말할 때의 ‘성’과, 한 사람의 몸에 어떤 의학적 개입을 할지 정할 때의 ‘성’은 같은 단어지만 같은 질문이 아니다. 앞의 것은 생물학이 꽤 분명하게 답한다. 뒤의 것은 생물학의 지식이 꼭 필요하지만, 생물학만으로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당사자의 삶과 가치, 위험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판단이 들어간다. 이것은 나의 해석이다.
과학자가 이 논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일은, 어느 한쪽의 구호에 생물학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메커니즘을 끝까지 보여 주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범주를 지키려는 쪽도, 범주를 허물려는 쪽도 생물학을 인용한다. 그러나 생물학이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은 대개 양쪽 구호보다 더 복잡하고 더 흥미롭다. 그 복잡함을 견디는 것이 과학의 문화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반론도 있다. 초파리의 성 결정은 포유류와 크게 다르니, 파리의 이야기를 사람에게 끌어오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다. 맞는 말이다. 초파리에서 세포가 스스로 성을 정한다면, 포유류에서는 생식샘이 먼저 정해지고 호르몬이 온몸에 영향을 주는 비중이 훨씬 크다. 그래서 나는 초파리를 사람의 모형으로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분법이냐, 스펙트럼이냐’라는 질문 자체가 너무 거칠다는 것, 그리고 같은 생물 안에서도 범주와 과정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잘 연구된 사례가 초파리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다시 하얀 판 앞으로 돌아간다. 붓 끝에서 파리를 굴리며 우리는 매일 ‘암컷’, ‘수컷’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실험은 그 분류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가끔 손이 멈추는 파리가 나온다. 브리지스는 그 파리를 버리지 않았고, 그 덕에 우리는 한 세기 동안 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조금씩 알게 됐다.
범주는 연구의 도구이지 연구의 끝이 아니다. 두 개의 배우자와 여러 갈래의 길. 그 둘을 함께 쥐고 있을 수 있을 때, 과학은 논쟁의 무기가 아니라 논쟁을 조금 더 정확하게 만드는 공동의 언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과학자
출처
- 남자와 여자, 딱 둘뿐이라고?…그 기준은 누가 정했나 (정우현의 과학서평). 교수신문 (2026.10.9).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10883